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물산·제일모직 합병 관련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지 1년여 만에, 한국 정부가 같은 합병 과정에 개입한 책임으로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약 1530억 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국제중재 판정이 나왔다.

법무부에 따르면 국제투자분쟁(ISDS) 환송중재 판정부는 지난달 30일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배상원금 약 4849만 달러와 연 복리 5%의 지연이자 등을 지급하라고 판정했다. 배상원금 약 660억 원에 지연이자와 소송비용을 더하면 총액은 약 1억1300만 달러, 한화 약 1530억 원에 이른다.

판정부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개입한 행위와 엘리엇이 입은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.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 11% 이상을 보유한 주요 주주로 합병안에 찬성했고, 엘리엇은 합병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정부 개입으로 합병이 성사돼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해왔다.

형사재판에서 이 회장의 부당합병·회계부정 혐의는 인정되지 않아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. 그러나 이번 판정은 판단 대상이 다르다. 형사재판이 이 회장과 삼성 관계자들의 범죄 성립 여부를 따졌다면, 국제중재는 한국 정부의 국민연금 의결권 개입이 외국인 투자자의 손해로 이어졌는지를 판단한 것이다.

이번 판정은 정부가 올해 2월 영국 법원에서 기존 중재판정을 일부 취소시킨 지 약 7개월 만에 다시 나온 결과다. 영국 법원은 국민연금을 국제투자분쟁상 국가기관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, 환송중재 판정부는 국민연금 자체의 지위와 별개로 정부의 개입 행위와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는 인정된다고 봤다.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에 찬성을 압박한 혐의로 기소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각각 징역 2년 6개월이 확정된 바 있다.